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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과 항만검역

기사승인 [0호] 2020.03.10  14: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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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만검역의 시작-페스트 유럽 전파후 발칸항구도시 두브로부니트 모든 선박
인근섬에 30일간 격리후 승선자중 환자 없는 사실 확인 후 상륙 조치, 유럽 각 항구도시도 뒤따라"



생명체 탄생과 진화의 긴 역사에서 보자면, 바이러스, 박테리아, 세균, 기생충 등은 인류보다 먼저 출현했다. 어떤 경위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일부 미생물과 기생충은 인류 탄생과 거의 동시에 인간의 몸 안팎에 서식하면서 인간과 함께 진화했다. 수십만 년에 걸쳐 인간과 공존하면서, 이것들 중 일부는 인간의 면역 체계에 동화(同化)했고 다른 일부는 인간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예컨대 유산균이나 대장균은 인간의 몸에서 일정 농도 이상으로 증식하기 전에는 소화 기능에 도움을 준다. 무균(無菌) 상태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적당량의 박테리아와 세균이 몸 안에 있어야 건강하다. 심지어 감기 바이러스조차도 인간에게 ‘쉴 때’를 알려주어 과로를 방지하는 긍정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반면 피부에 기생하는 진드기, 이, 벼룩 등과 내장에 기생하는 각종 기생충은 수십만 년 동안 계속해서 인간을 괴롭혔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인간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숙주가 죽으면 기생하는 생명체도 죽기 때문에, 숙주를 죽이지 않는 것이 기생 생명체가 생존하면서 진화할 수 있는 길이었다. 이 점에서 인간과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생명체가 면역적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공존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라고도 할 수 있을 터이다.


인류가 수십만 년에 걸친 진화과정에서 자기 몸에 동화했거나 면역력을 확보한 것 이외의 미생물과 세균들에게 공격받기 시작한 것은 동물을 사육하면서부터였다. 인류가 가축을 기르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1만 년 전부터였다. 현생인류가 출현한 것은 겨우 20만 년 전이니, 인류 역사 전체로 보자면 아주 가까운 과거에 해당한다. 인류가 소, 말, 개, 돼지 등과 동거하면서 이들 동물에 기생하던 미생물과 기생충들이 인간의 몸을 공격하는 일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인수공통(人獸共通) 감염병’들이 생겨난 것이다. 가축을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는 병원체도 인간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일본식 용어 천연두(天然痘)로 알려진 두창(痘瘡, smallpox)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간을 살해한 ‘살인마’가 두창균이다. 소는 이 세균에 감염되어도 가볍게 앓고 말았지만, 인간은 20%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병을 이기고 살아남은 사람 반 정도의 얼굴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남았다. 치사율 20% 이상은 그나마 수천 년간 소와 사람이 동거했던 지역에만 해당했다. 본래 소를 키우지 않았던 아메리카 대륙의 경우, 유럽에서 소가 들어간 지 수십 년 사이에 원주민 인구의 90% 가까이가 두창에 걸려 사망했다.
 

지표 전역을 떠돌던 인류는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정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Fernad Braudel)은 이를 ‘최초의 선택’이라고 불렀다. 이는 특정한 인간집단이 자기들과 동거할 병원체를 ‘선택’하는 일이기도 했다. 인류는 이후 수천 년간, 병원체의 반복적인 공격을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에 대한 면역력을 키웠다. 인류는 병원체별 면역력의 정도에 따라서도 여러 부류로 나뉘었다. 대륙 간, 또는 문명권 간 인구 이동은 극도로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병원체의 이동도 자연히 억제되었다.


다른 대륙, 다른 문명권에서 들어온 감염병이 그에 대한 면역력이 취약한 인간집단에게 치명적인 위해(危害)를 가하기 시작한 것은 기록상 대략 1천 년 전부터였다.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대략 200년에 걸쳐 유럽인들은 ‘성지 수복’이라는 명목으로 지중해 동쪽과 소아시아 지역을 공격했고, 일부는 점령지에서 장기 주둔했다. 인도 중국 서남아시아 일대 사람들에게 풍토병처럼 발생하던 한센병(나병, 또는 문둥병)이 귀환하는 십자군을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전염력은 높지 않으나 일단 감염되면 치료가 불가능했던 이 병은, 그 증상이 참혹하기까지 해서 ‘천형(天刑)’으로 취급되었다. 12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유럽 전역에 수백 개소의 한센병 환자 격리수용소가 생겼으나, 격리된 환자보다 도시 안을 떠돌아다니는 환자 수가 훨씬 많았다. 그 시대 유럽인들에게 이들은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자 천형(天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뒤이어 페스트가 창궐하기까지는.

몽골제국이 여러 개의 칸국으로 분리된 뒤인 1345년, 킵차크 칸국의 자니베크 칸이 크림반도에 있는 도시 카파를 공격했다. 당시 카파는 제노바 공국의 식민도시였다. 몇 달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몽골군 진영에서 치명적인 감염병이 돌았다. 몽골군은 자기 병사들의 시체를 투석기에 올려 성 안으로 날려 보냈다. 성 안에는 제노바 및 그와 동맹을 맺은 여러 이탈리아 도시 공국 병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 시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몽골군은 물러갔으나, 그들이 던져 넣은 감염병은 흑해 연안 일대로 퍼져 나갔다.


페스트는 아시아 북부 초원지대에 서식하는 들쥐에게서 옮는 병으로 알려졌다. 페스트균이 사람을 가리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오랫동안 가까운 데에서 살아온 몽골인들에게 덜 치명적이었다. 페스트균에 대한 면역력은 평균적으로 몽골인들이 더 강했다. 1347년 8척의 갤리선이 카파에서 제노바를 향해 출항했으나, 이들 중 4척만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머지 4척에 승선한 사람들은 항해 중 전원 사망했다. 살아서 제노바에 도착한 사람들은 감염된 채 이탈리아 전역으로 흩어졌다. 유럽 인구의 1/4 내지 1/3을 격감시킨 페스트 대유행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대항해시대’는 아메리카 두창과 유럽의 매독 쌍방 재앙의 시대이기도

페스트가 유럽에 전파된 직후, 발칸반도의 항구도시 두브로부니크((Dubrovnik) 참사회는 입항하는 모든 선박을 인근 섬에 30일 간 격리시켰다가 승선 인원 중에 환자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상륙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항만 검역(檢疫)의 시작이었다. 이 방식이 페스트 확산을 방지하는 데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럽 각 항구 도시들이 뒤를 따랐다. 1448년, 베네치아 의회는 30일 간의 격리 기간을 40일로 늘렸다. 그들은 선박 격리 장소를 ‘40일간 격리하는 곳’이라는 뜻의 ‘콰란티나(quarantina)’라고 불렀는데, 검역을 의미하는 영단어 ‘쿼런틴(quarantine)’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선박을 대상으로 ‘검역’이라는 말이 생긴 지 반세기쯤 지나, 이른바 ‘대항해시대’가 시작되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컬럼버스기 ‘신대륙’을 발견하고 귀환한 직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유럽인들이 그때까지 겪지 못했던 감염병이 퍼졌다. 성 접촉으로 전염되는 매독(syphilis)이었다.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는 독일, 스페인, 스위스 병사들로 연합군을 편성해 이탈리아 나폴리를 침공했다. 얼마 후 한센병보다 지독한 피부병을 앓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샤를 8세는 부득이 철수했고, 이후 프랑스인들은 이 병을 나폴리병이라고 불렀다. 병이 어디에서 처음 시작되었는지 몰랐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한동안 이 병에 자기들이 가장 혐오하는 나라나 종교의 이름을 붙였다. 이탈리아인들과 영국인들은 프랑스병이라고 했고, 네덜란드인들은 스페인병, 투르크인들은 기독교병이라고 불렀다. 이후 20세기 초 ‘마법의 탄환’이라는 별명이 붙은 살바르산이 발명되기까지, 매년 유럽에서만 1천만 명 이상이 매독으로 사망했다. 이른바 ‘대항해시대’는 아메리카의 두창과 유럽의 매독이라는 쌍방 재앙의 시대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매독이 처음 들어온 것은 1500년대 초로 추정된다. 1614년 이수광은 『지봉유설』에 이 병이 명나라 정덕(正德, 1505-1521) 연간에 들어왔다고 기록했다. 처음에는 천포창(天疱瘡) 또는 양매창(楊梅瘡)으로 불렀으나, 그 전부터 있던 매독이라는 질병과 증상이 비슷해 이윽고 그 이름을 탈취했다. 조선인 대다수가 유럽인이나 아메리카인과 접촉하기는커녕 그 땅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던 시절에 질병이 먼저 들어온 것이다. 원 발생지에 거주하는 사람을 접촉하는 것과 바이러스나 세균을 접촉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한국 역사학계 일각에는 조선 후기 왕실 후손이 번성하지 못한 이유가 매독 때문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인도북부 펀자브일대 풍토병 콜레라 18세기 동인도회사 영국인 통해 전세계로 확산
 

대항해시대 이후 지구 전역에서 인간의 이동이 늘어남에 따라 감염병도 세계 도처로 확산했다. 매독 이후 세계인을 공포에 떨게 했던 질병은 콜레라였다. 인도 북부 펀자브 일대의 풍토병이었던 콜레라는 18세기부터 동인도회사의 영국인 직원들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했다. 이 감염병이 우리나라에 도달한 것은 19세기 초, 1820년대였다. 그 전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을 괴롭혔던 양대 역병은 마마(=두창)와 염병(=장티푸스)이었다.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염률과 치사율이 매우 높은 두창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려했다. 그래서 이 병에는 ‘호구별성’이라는 신격화한 이름이나 ‘마마’라는 극존칭을 붙였다. 반면 증상이 지독하기는 하나 전염률과 치사율은 상대적으로 낮았던 염병은 ‘저주용 단어’로 자리 잡았다. 단순히 “염병하네”에서부터 “염병막 살이 3년에 똥물 한 바가지 못 얻어먹을 놈”에 이르기까지, 염병을 소재로 한 저주와 욕설은 무척 많았다. 마마와 염병은 위험하지만 토착화한 감염병이었고, 그런 만큼 한국인들에게 면역력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콜레라는 아주 새로운 감염병이었다. 중국인들은 이 질병을 ‘호열자(虎列刺)’로 번역했는데, 중국어 발음이 콜레라와 비슷했던 데다가 증상도 ‘호랑이 발톱에 찢기는 것’처럼 아팠기 때문이다. 콜레라는 1820년대 초 처음 발병한 이래 대체로 10년 마다 한 차례씩 한반도 전역을 휩쓸었다. 콜레라가 한 번 창궐할 때마다 전국적으로 1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1911년 콜레라 대유행 때에는 서울에서만 1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당시 서울 인구는 25만 명이었다. 서울 인구의 4%가 콜레라에 희생된 셈이다. ‘호환 마마보다 무섭다’는 우리 속담이 생긴 것도 19세기로 추정된다. 마마와 함께 거론되는 호환은 ‘호랑이에게 물린다’는 본래 뜻이 아니라 ‘호열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1876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가 탄저균, 결핵균, 콜레라균을 잇따라 발견하기까지, 감염병 확산의 원인에 대해서는 무성한 추측들만 난무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흔했던 주장은 천벌 또는 천형(天刑) 설(說)이었다. 특히 하늘이 ‘임금을 지명해 그로 하여금 자기 뜻을 지상에 펼치게 한다’는 유교적 ‘천명설(天命說)’을 믿은 유교 문화권에서는 역병을 군주에 대한 하늘의 견책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염병할’은 ‘천벌 받을’과 같은 뜻이었다. 그래서 역병이 돌면 왕이 직접, 또는 고관(高官)을 보내 여제(厲祭)를 지냈다. 신성권력과 세속권력이 분리되었던 중세 기독교 문명권에서는 사제들이 역병 퇴치를 위해 기도를 올리곤 했다.


두 번째는 장기설(瘴氣說)로 음습하거나 더러운 기운, 또는 원한을 품고 죽은 귀신의 기운 등이 한 곳에 쌓여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병을 옮긴다는 주장이다. 병의 원인에 대한 설명은 비과학적이나 병이 옮는 경로에 대한 설명은 세균설과 흡사했다. 장기설은 코흐가 세균을 검출해 낸 뒤에도 한동안 사그러들지 않았다. 장기설에 따르면 감염병 예방을 위한 최선책은 환자가 발생한 지역 또는 장소에 접근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장기설은 비록 비과학적이지만 검역 제도 수립에 기여한 바 크다.


우리말에서 병은 나기도 하고 들기도 하며 걸리기도 하고 옮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 몸 안에 잠재해 있던 병기(病氣)가 특정한 조건에 촉발되어 나타나는 것이 ‘병나다’, 몸 밖에 있던 병기가 몸 안으로 침투하는 것이 ‘병들다’, 병기가 쌓여있는 곳을 지나다 발에 걸리는 것이 ‘병 걸리다’, 옴이나 벼룩처럼 타인의 몸에 있다가 옮겨 오는 것이 ‘병 옮다’이다. 이들 중 ‘병나다’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외부 요인에 의한 것이다. 감염병을 막기 위해서는 환자의 신체 또는 환자가 거주한 장소를 건강한 사람들로부터 격리해야 한다는 생각은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외국과 교류가 흔해지기 전에, 이런 생각이 적용되는 영역은 국내뿐이었다. 마을을 봉쇄하거나 골목을 봉쇄하는 일은 있었어도, 항구를 봉쇄할 이유는 없었다.

1886년 5월 20일 ‘불허온역진항장정(不許瘟疫進港章程)’ 제정, 공포-국내 최초 항만검역 법규


일본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지 10년,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지 4년째 되던 해인 1886년 5월 20일, 조선정부는 ‘불허온역진항장정(不許瘟疫進港章程 - 이하 ’온역장정‘으로 약기)’을 제정, 공포했다. ‘역병 환자가 승선한 선박은 항구에 진입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항만 검역 법규였다. 2013년 한국 정부는 이를 기념해 5월 20일을 ‘검역의 날’로 정했다. 조선 정부는 중국과 일본에서 먼저 시행한 검역 제도를 본떠 온역장정을 제정했지만, 뜻대로 시행하지는 못했다. 우선 외국인들이 인정할 정도의 근대 의학 지식을 갖춘 의사가 없었다. 1884년 입국한 미국 북장로회 소속 의료 선교사 호레이스 N. 알렌이 해관(海關) 촉탁의를 겸했지만, 그는 서울과 인천을 왔다 갔다 하며 간헐적으로 검역 업무를 수행했다. 게다가 불평등조약 체제하에서 외국 국적 선박 승선원들은 조선의 법규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그들은 군함(軍艦)의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는 변칙을 강요해 관철시켰고, 상선들도 조선 관리의 승선 검사를 거부하곤 했다. 서울에 가까운 인천항의 사정조차 이랬으니, 부산과 원산은 말할 것도 없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의 와중에서 갑오개혁이 추진되었다. 이 개혁으로 왕실 사무와 일반 행정 사무가 분리되었으며, 궁내부와 의정부가 각 사무를 분장(分掌)했다.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의 6조 체제는 아문(衙門) 체제로 바뀌었다. 관리 인사(人事)와 국내 행정을 총괄하는 내무아문 산하에는 위생국이 설치되었다. 근대 서양의학의 위생 지식을 수용한 결과였다. 대한제국 선포 2년 뒤인 1899년에는 내부 위생국 주도로 <전염병 예방규칙>과 <검역정선규칙(檢疫停船規則)>이 제정되었다. 이들 법규에 따라 두창,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콜레라, 이질, 디프테리아의 6종 전염병이 ‘법정 전염병’으로 규정되었고, 이들 전염병에 걸린 환자가 탑승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선박은 검역이 완료될 때까지 항만에서 대기해야 했다. 하지만 이 법규 역시 취지대로 시행되기 어려웠다. 구미인들은 대한제국의 법령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자기들이 운반하는 전염병보다 한국인에게 감염될 가능성이 있는 전염병을 더 걱정했다.


1910년 일본선박 항만검역 중단, 조선발 일본향 선박들 검역 시작,
1918년 ‘스페인독감’ 창궐 인류의 1/3 감염 감염자 10%이상 사망 ‘의학적 홀로코스트’


1910년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함으로써 일본 선박에 대한 항만 검역은 중단되었다. 반면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선박들에 대한 검역이 시작되었다. 일본인들은 식민지 원주민인 조선인들을 병균과 비슷한 존재로 취급했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감염병의 문은 활짝 열어 두면서도,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감염병의 문은 닫는 것이 식민지 체제였다. 이런 상태에서 1918년 겨울, 이른바 ‘스페인 독감’이 창궐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18년 초여름, 프랑스에 주둔하던 미군 병영에서 독감 환자가 발생했다. 그 뒤 귀환하는 각국 군대를 따라 전 세계로 확산한 독감은 1920년 중반까지 2년 간 엄청난 피해를 냈다. 인류의 3분의 1 이상이 감염됐고, 감염자의 10% 이상이 사망했다. 당시 각 국이 사망자 통계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는 알기 어려우나, 학자들은 최소 3천만, 최다 1억 명 정도가 이 병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피해 규모가 14세기에 유럽을 황폐화시켰던 페스트보다 커서 이를 ‘의학적 홀로코스트’라고도 한다. 이 질병이 확산하기 시작했을 때 참전 각국의 언론은 ‘전시 보도통제’ 하에 있었다. 그 때문에 질병 확산에 관한 소식은 비(非) 참전국이었던 스페인 신문에 주로 보도되었다. 이 질병에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1918년 초겨울에는 우리나라에도 일본을 통해 이 독감 바이러스가 전파되었다. 당시 가톨릭 교단에서 발행하던 잡지 <경향>은 이를 ‘인플루엔자’라고 소개했다. 한국인 절대다수가 바이러스라는 이름을 모르던 때였다. 당연히 조선총독부도 이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 통계를 내지 않았다. 다만 일본의 예에 비추어 보면 조선 내 감염자 700만 명 이상, 사망자 20만 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보다 열악했던 조선의 위생 행정을 감안하면 이보다 더 많았을 수도 있다. 조선의 외부, 특히 일본에서 유입된 질병이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조선총독부는 항만 검역을 특별히 강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일본인의 이익이 조선인의 생명보다 중요했다. 인플루엔자가 유행하여 사망자가 속출하는 와중에 3.1운동이 일어났다. 이 질병이 당시 사람들의 심리상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1950년 한국전쟁 한반도 전역 전염병 전시장화-콜레라,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디프테리아,
말라리아, 이질, 유행성 출혈열 병영과 피난민 수용소 덮쳐, 한탄바이러스 서울바이러스도 처음 발견


한국인들은 1948년 정식 정부 수립 후 검역 주권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바이러스와 세균이 바닷길로만 전파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1950년의 한국전쟁은 한반도 전역을 전염병의 전시장으로 만들었다. 콜레라,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디프테리아, 말라리아, 이질, 유행성 출혈열 등이 번갈아 또는 동시에 병영과 피난민 수용소를 덮쳤다. 전쟁 중에 한탄강 변에서 한탄바이러스가, 서울에서 서울바이러스가 처음 발견되기도 했다. 정부와 군 의무당국은 이들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군인들과 피난민들에게 예방 주사를 놓았는데, 주사기를 소독하지 않고 여러 차례씩 사용했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인들 사이에 감염을 확산시켰다. 전쟁 중에는 ‘세균전’에 관한 소문도 무성했다.
 

전쟁 중 한반도에 들어온 감염병들은 대개 토착화하여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한국인들을 괴롭혔다. 한국인들이 콜레라, 장티푸스, 뇌염 등의 전염병에 대한 공포에서 그럭저럭 해방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였다. 그 이전에는 매년 감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100명을 넘었다. 그런데 그 얼마 후 본격적인 ‘세계화’ 시대가 열리면서 감염병에 대한 공포는 새로운 단계로 이행했다. 조류독감, 신종플루, 사스, 메르스, 에볼라 등 특정 지역에만 존재했던 바이러스 또는 변종 바이러스들이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인들을 위협하고 있는 ‘코로나19’도 그런 바이러스의 하나다.


바이러스와 세균에 대한 최후 저지선은 개개인의 신체이지만, 최전방 저지선은 항만과 공항이다. 그리고 ‘불허온역진항장정’이나 ‘검역정선규칙’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검역 대상은 특정 국가 국민이 아니라 선박과 비행기 탑승객 전원이다. 바이러스와 세균은 사람의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공항을 통한 인구 이동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오늘날 항만 검역은 상대적으로 등한시되지만, 바이러스와 세균이 꼭 사람에 묻어 이동하라는 법은 없다. 항만 검역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국민의 건강과 안녕을 지키기 위한 최전방 보루 역할을 해나갈 것이다.

 

전우용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komares@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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