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기사승인 [597호] 2023.05.30  10:05:21

공유
default_news_ad1
article_right_top

5월 콤파스가 19일에 열려 고려종합국제운송 권오인 사장이 ‘컨테이너 정기선 해운과 물류’를 주제로 발표했다. 발표내용은 다음 콤파스에 게재할 예정이다.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지난 3월 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 기념 특별전시회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품’으로 인해 합스부르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졌다. 천여년간 유럽에 군림하며 최초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세운 유럽의 왕가 합스부르크는 과연 어떤 가문이었고, 또 어떤 나라였을까?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마사리크대학 교수 마틴 래디가 그의 저서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에서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이 책은 천년에 걸쳐 이룩했다가 속절없이 무너져 흩어지고 잃어버린 왕가의 역사를 다룬 장엄한 서사시다. 스위스 작은 마을의 평범한 뿌리에서 출발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차츰 번창하여 15세기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그 후 수십년 만에 유럽에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서부터 스페인까지, 세계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신대륙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1차 세계대전 참화에 휩싸일 때까지 중앙 유럽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경이롭고 신비롭기까지 한 합스부르크의 뿌리와 성장 및 소멸 과정을 소개한다.
 


합스부르크 성과 포틴브라스 효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람들은 10세기 말엽에 활동한 인물이다. 그들은 라인강 상류 지역과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지대인 알자스, 그리고 스위스 북부 지방인 아르가우에서 살았다. 신성로마제국에 해당하는 그곳은 슈바벤 공작령에 속하고, 자치 성격이 짙은 백작령 즉 가우로 나뉘었으며, 각자 백작들이 있었다. 가장 이른 시기의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 중에 칸첼린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스위스 아르가우의 소도시 부루그 근처에 있는 알텐부르크의 작은 요새에 거처했다. 990년경 칸첼린이 죽자 그의 두 아들 라트보트와 루돌프가 아버지의 영지를 나눠 가졌다. 어느날 라트보트는 사냥을 나섰다가 가장 아끼던 매를 잃어버려 매를 찾아 헤매던 중 아레강 근처에서 암석 노출지를 발견했는데, 그곳은 요새를 세우기에 이상적인 장소였다. 라트보트는 그곳에 요새를 만들고, 하비히츠부르크 즉 매의 성이라고 불렀다. 하비히츠부르크 줄여서 합스부르크는 세월이 흐르면서 라트보트 상속자들이 가문으로 즐겨 쓰는 지명이 됐다. 라트보트가 물려받은 땅에는 알텐부르크에서 25킬로미터 떨어진 무리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그는 무리에 살고 있던 여인 이타와 혼인하며 그 마을을 선물로 그녀에게 주었다. 신앙심이 깊은 이타는 베네딕토회 소속 무리 수도원을 세웠고, 나중에 부속 교회의 제단 옆에 묻힐 수 있었다. 그녀가 그곳에 묻히고 나서 한참 뒤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황제 카를과 황후 치타의 심장이 예배당 제단 옆에 안치되었다. 처음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위스 아르가우 지방의 여러 귀족 가문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12세기에 들어 합스부르크 가문은 슈타우펜 가문의 정적에 맞서는 황제 로타르 3세를 지지했고, 그 대가로 황제는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방백이라는 칭호뿐 아니라 남부 알자스의 여러 소유지를 하사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이 부상한 데에는 이른바 포틴브라스 효과의 영향이 더 컸다. 이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모든 주인공이 죽어 쓰러져 있을 때, 노르웨이의 포틴브라스 왕자가 나타나 ‘기억의 권리’를 되새기며 빈 옥좌를 차지하는 것을 뜻한다. 포틴브라스처럼 합스부르크 가문도 경쟁자들이 모두 죽은 뒤의 공백을 틈타 득세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생존이 전부일 때에 누가 승리를 얘기하는가?”라고 물었다. 초창기 합스부르크 가문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생존이었다. 

 

신성로마제국과 프리드리히 3세
신성로마제국은 통일된 왕국이 아니라, 자유와 권리를 보유한 독자적인 성격의 영토와 도시들의 연합이었다. 제국은 당대의 정의에 따라 각자 받아야 할 몫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인 자유와 권리를 부여하기 위해 존재했다. 당시의 신성로마제국에는 각 영토 및 도시의 권리와 자유를 지켜줄 정부가 없었다. 수도와 중앙행정기관이 없었고, 정기적인 세입도 없었으며, 통치자가 위임한 법을 집행하는 법원의 위계 조직도 없었다. 권력의 향방은 오직 대영주와 제후들에게 달려있었다. 로마인의 왕을 군주로 선출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또한 군주는 교황에게서 황제의 관을 받아야만 황제가 되었다. 순조롭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신이 실추하는 일이 1356년에 벌어졌다.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4세는 로마에서 황제의 관을 받은 직후 금인칙서를 반포했다. 금인칙서에는 통치자 선출과 관련한 새로운 계획이 담겨있었는데, 합스부르크 가문이 새로 정해진 선거인단에서 빠졌다. 신성로마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헌정문서에서 누락된 것이다. 이어진 조치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스트리아 공작으로 책봉되자, 사람들은 오스트리아 공작령을 중요성이 낮은 곳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가 되었다. 그 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알브레히트 공작이 오스트리아에 오래 머문 까닭에 오스트리아인으로 불렸고, 오스트리아라는 용어가 합스부르크 가문을 가리키는 계기가 되었다. 원래는 동쪽 영역인 오스타리히라고 불리던 오스트리아의 초창기 통치자는 바벤베르크 가문이었다. 바벤베르크 가문의 땅은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니벨룽겐의 노래의 초기본은 게르만 신화에서 비롯된 이야기들과 그 지배 왕가의 역사에 나오는 일화들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운명은 1411년 오스트리아 공작령의 통치권을 넘겨받은 알브레히트 공작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바뀌었다. 그는 독실하고 정력적인 교회 개혁가이자 유능한 행정가요, 무적의 군인이었다. 알브레히트는 1433년 황제의 관을 받은 지기스문트를 지지한 덕분에 지기스문트의 딸 엘리자베트와 결혼했고, 아들이 없는 지기스문트는 알브레히트를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위를 물려받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는 1437년 지기스문트가 세상을 떠나자 어렵지 않게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으로 등극했고, 이어 선제후들의 지지로 신성로마제국, 오스트리아 공작령, 보헤미아왕국, 헝가리왕국이 하나로 뭉쳐져 한 사람의 통치자인 그가 다스리게 됐다. 그로부터 18개월 뒤 알브레히트는 이질에 걸려 죽었고, 그에게 남성 상속자가 없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최연장자 알브레히트의 육촌 프리드리히가 1440년 왕으로 선출되어 황제에까지 올라 프리드리히 3세가 되었다. 그는 키가 크고 금발을 휘날리는 늠름한 체격으로 위인의 모든 자격을 갖추었으며, 예루살렘 성묘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기사로 불린 유력한 기사단체 일원이었다. 프리드리히는 활동적이어서 한밤중까지 이어지는 자문회의에 매일 참석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행정적 결함을 만회하고자 지방 행정관들을 임명하여 사람들의 불만을 처리하고 통치자의 결정을 집행할 책임을 그들에게 부여했다. 프리드리히의 대리인들은 멀리 떨어진 작센, 발트해 연안, 리보니아에서도 분쟁 해결에 개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프리드리히는 건설자이기도 했다. 빈의 성 슈테판성당에 유럽 대륙에서 가장 높은 궁륭형 석조를 설치했고, 성 게오르크 예배당에 그의 가장 유명한 기념물도 남겼다. 거기엔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대공의 관을 쓴 젊은 시절의 프리드리히가 서 있고, 그의 오른쪽에는 천사가 방패를 들고 있는데, 방패에는 AEIOU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는 라틴어로 “선택된 독수리(오스트리아)가 마땅히 모든 것을 정복한다(Aquila Electa Iuste Omnia Uincat)”라는 뜻이다. 프리드리히는 장수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는 친척과 적들보다 오래 살았고, 덕분에 나뉜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 재산들을 묶어 관리할 수 있었다. 1493년 프리드리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미 55년간 신성로마제국의 통치자로 군림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황실처럼 보였다. 

 

막시밀리안과 세계의 통치자 카를 5세
프리드리히의 아들 막시밀리안이 1486년 왕으로 선출되었고, 그로부터 7년 뒤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무난히 권력을 잡았다. 막시밀리안의 통치방식은 인품과 친림(親臨)에 의존했고, 그 두 가지가 부족할 때에는 이미지로 보충했다. 17세기 유럽에는 “남들이 전쟁을 벌일 때 행복한 오스트리아는 결혼한다”는 말이 떠돌았다. 막시밀리안은 결혼동맹의 덕을 톡톡히 본 왕이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이 스페인 왕실과 보헤미아왕 야기에우워 가문을 상대로 성공시킨 두 차례의 이중 결혼은 모두 도박이었다. 저지대 헨트의 카를이 훗날 카를 5세가 되어 보았듯이, 결혼외교는 성과를 보장할 수 없기에 불확실하고 위험했다. 그렇지만 나중에 드러났듯이 막시밀리안의 도박은 성공했다. 그의 상속자들은 유럽뿐 아니라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막시밀리안의 망상, 과시적 행동, 어설픈 예술적 취향을 비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거창한 계획을 통해 회자되던 백색왕의 우화를 합스부르크 가문을 위한 정치적 현실로 탈바꿈하는데 성공했고, 그의 상속자들은 유럽 대부분을, 나아가 스페인과의 연결을 통해 신대륙까지 호령하게 되었다. 그는 행운과 결혼과 전쟁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을 중앙 유럽의 중위권 왕가에서 프랑스에 버금가는 유럽 최고의 세력으로 변모시켰다. 그의 뒤를 이어 황제로 등극한 손자 카를 5세의 치세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한걸음 더 나가 세계적 강자로 군림하였다. 
 막시밀리안은 1519년 세상을 떠났고, 그의 두 아들은 이미 죽은 지 오래여서 저지대에서 성장한 손자 카를이 왕위를 이었다. 어린 카를은 1516년에 이미 외할아버지인 아라곤의 페르난도가 세상을 떠나면서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았었다. 카를의 왕위 승계로 확보한 영토는 그야말로 광활했다.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 사르데냐, 북아프리카 해안의 영토들과 튀니스 그리고 신대륙의 상당 부분이 스페인의 영토가 되었다. 멕시코, 페루에 이어 태평양의 필리핀이 탐험가 마젤란에 의해 스페인의 차지가 되어, 훗날 카를의 아들 펠리페의 이름을 따서 필리핀으로 불렸다. 광활한 영지를 보유한 카를은 세계의 지배자였고, 멕시코를 정복한 코르테스의 말대로 왕 중의 왕, 우주의 군주였다. 

 

30년 전쟁과 베스트팔렌조약
개신교와 가톨릭의 갈등으로 빚어진 보헤미아의 반란은 30년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흔히 종교전쟁으로 분류되는 것과 달리 30년 전쟁은 쉽게 범주화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대규모의 싸움이 그렇듯이 30년 전쟁도 독자적 명분을 지닌 여러 가지 개별 투쟁으로 이루어졌다. 전투는 대부분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났지만, 저지대 국가인 벨기에와 네덜란드, 영국, 덴마크,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이탈리아 북부, 스웨덴, 폴란드 등지로 번졌고 나중엔 멀리 떨어진 러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 군주국과 네덜란드 연합주(聯合州) 간의 투쟁은 30년 전쟁을 국제적 차원의 싸움으로 확산시켰다. 당시 스페인 왕과 신하의 이론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는 그물처럼 얽혀 있어 어느 한 곳이 쓰러지면 전체가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력이 세계 곳곳으로 뻗어 서로 맞물려 있었기에 30년 전쟁은 세계적 범위의 싸움으로 비화했다. 네덜란드의 야심은 컸다. 네덜란드 정부와 의회는 해외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인과 싸워야 하는 임무를 2개의 상사 즉,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에 맡겼다. 두 회사 모두 전쟁용 함대를 구축하고 해외 식민지를 빼앗아 경영하며 독자적인 상업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주식을 팔 수 있었다. 30년간 이어진 소모적 전쟁이 승자도 패자도 없이 지루하게 계속되자 각국은 협상하지 않으면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635년 프라하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내세운 프라하 평화조약의 취지는 “유혈사태를 확실히 끝내고, 소중한 조국인 가장 고귀한 독일인 국가를 최종적 파멸에서 구하는 것”이었다. 프라하 평화조약 이후 스웨덴과의 동맹을 바탕으로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전쟁을 주도한 것은 프랑스군이었다. 따라서 이제 전쟁은 종교적 성격이 거의 사라지고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 간의 정치적 대결로 탈바꿈했다. 그 무렵 프랑스는 카탈루냐인들이 스페인의 펠리페 4세에 맞서 일으킨 봉기와 포르투갈 독립선언을 지지함으로써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에 치명타를 입혔다. 역설적으로 평화협상이 시작되자 교전국들은 협상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애쓰는 바람에 싸움이 더욱 치열해졌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랜 전쟁으로 군사적으로 기진맥진했고, 스웨덴과 프랑스도 전략을 두고 서로 의심하며 대립하자, 강화의 분위기가 고조됐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페인 문제에 간섭하지 않고 피레네산맥 접경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에도 중립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여 프랑스를 협상장으로 이끌었고, 스웨덴에겐 두둑한 현금을 미끼로 마음을 돌리게 했다. 30년 전쟁을 종식시킨 베스트팔렌조약의 기본적인 내용은 경계 획정과 영토권 인정이며, 선제후 칭호 허용 등으로 채워졌다. 하지만 베스트팔렌조약은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이 종교를 선택할 수 있음을 확인했고, 칼뱅파도 여러 선택지 중 하나로 인정했을 뿐 아니라 각 제후의 신민들이 각자의 신앙을 실천하며 살 수 있는 권리를 허용했다. 베스트팔렌조약은 기독교 세계의 전반적인 평화 달성을 목표로 삼아 최초의 유럽헌법을 제정한 조약으로 높이 평가되어 세계적 차원의 평화조약이었다. 또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해안뿐 아니라 동인도와 서인도 그리고 브라질의 육지처럼 바다와 여러 수역에서 스페인 군주와 네덜란드 연합주 간의 모든 갈등을 청산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또한, 그때까지 획득한 정복지가 인정되었고, 네덜란드인들에게 스페인 식민지와 무역에서 특혜가 부여됐다.

 

계몽군주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0년 아버지 카를 6세를 이어 권좌에 올라 40년간 합스부르크 가문의 땅을 통치했다. 카를은 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여성 상속자만 남는 경우를 대비했다. 그는 딸이 태어나도 상속자가 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상속계획을 세워 그 내용을 신하들에게 회람시켰다. 4년 뒤 첫째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나자 카를은 상속계획을 널리 알리고 지방의회의 동의를 요구했다. 모든 지방의회가 국사 조칙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알려진 그 계획에 동의했다. 권좌에 오른 마리아 테레지아는 모성과 연약함이라는 여자다운 특성과 활기와 용기라는 남자다운 특성을 겸비하여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군주가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치세의 거의 절반을 전쟁을 치르면서 보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낸 후에 동맹을 활용한 효율적인 전쟁과 실리적인 외교로 영토를 크게 늘렸는데,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는 “그녀는 땅을 차지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눈물을 많이 흘릴수록 많이 차지했다”고 말했다. 재정 개혁과 자원의 적절한 관리도 그녀가 군사적으로 생존하는 데에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쇤브룬 궁전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수십 년간 지은 궁전으로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과 자웅을 겨루기 위해 세워졌다. 그녀는 이곳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광을 구현하려 했고, 계몽군주로서 자연법칙과 인간행위에 바탕을 둔 이성과 과학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가 신민들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는 과정의 기저에는 공동의 복리를 위해 신이 군주를 임명했다는 신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의 계몽주의는 단일한 현상이 아니었고, 장소에 따라 다른 모습을 드러냈다. 영국과 북아메리카에서의 계몽주의는 국민 주권의 확대와 통치권 제한인 개인의 자유와 시민 권리의 보장을 목표로 삼은 새로운 자유의 과학 쪽으로 기울었고, 중앙 유럽의 계몽주의는 국가의 과학과 질서의 철학을 내세우며 주권자가 규정하는 공익에 개인이 종속되는 상태를 지향했다. 복종과 충성, 근면을 통해 신민들이 행복해지도록 통치자가 채택한 모든 방법과 수단을 증진하는 식이었다. 이성과 자연법 그리고 사회적 이익이라는 포괄적 개념이 정부가 처리해야 하는 과업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정책의 열쇠는 관방학(官房學) 또는 재정과학에 달려있었다. 관방학은 국가의 체제 유지와 시민의 이익 추구 및 복리와 행복을 확대하는 수단인 세입을 최대화하는 제도와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관방학을 논리적 결말까지 밀어붙이지 않았다. 관방학이 단조로운 공리주의로 흐를 수 있고, 사회혁명을 유발할 우려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존의 위계질서를 보존하는 과업 역시 자신의 임무라고 믿었다. 계몽군주로선 한계가 있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성로마제국의 독일인 제후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과 7년 전쟁에서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으며, 프로이센의 야심에 맞서 자신의 대의명분을 지지하도록 제후들을 구슬리어 신성로마제국의 통치권을 잘 유지했다. 

 

메테르니히와 유럽의 지도
클레멘스 메테르니히는 1809년에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이 되었다. 라인란트 지방 출신인 그는 혁명기에 프랑스와 나폴레옹에게 모든 재산을 빼앗겼고, 외무장관에 임명됐을 무렵 그의 부채는 125만굴덴이나 되었다. 주군인 황제 프란츠 2세도 마찬가지로 파산한 상태였다. 프란츠의 영토도 크게 줄어들었다. 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을 치르는 동안 프랑스군을 상대로 끝까지 버텼던 프란츠의 군대는 영국, 프로이센, 네덜란드와 손잡고 벌인 지상전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프랑스의 황제가 된 나폴레옹이 영토를 확장하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를 조각조각 갈라놓았다. 1805년 영국 수상 윌리엄 피트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제국과 러시아가 나폴레옹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지도는 치우게. 앞으로 10년 동안 필요 없을 테니까”라고 말했다. 그 후 프란츠는 2차와 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을 벌였으나 번번이 패배하여 더 많은 영토를 상실했다. 프란츠는 나폴레옹이 스페인에서 난관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영국과 손을 잡고 전쟁을 재개했지만, 이번엔 나폴레옹 군에 의해 수도 빈까지 함락되자 강화를 서둘러 그나마 남아있던 영토마저 빼앗겼다. 
 파리주재 대사시절 메테르니히는 프랑스를 상대로 다시 전쟁을 벌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프란츠는 그를 외무장관에 임명했다. 당시 메테르니히의 주요 관심사는 시간을 버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는 프랑스에 대한 평화정책 수립을 촉구했다. 프란츠 황제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여 딸 마리 루이즈를 코르시카의 평민 출신 나폴레옹과 결혼시켰다. 사절로 공주와 나폴레옹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에 머물던 메테르니히는 첩보를 통해 나폴레옹이 러시아 정복의 야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마침내 빛이 보인다. 내가 파리에 온 목적을 이루었다”고 외쳤다. 메테르니히는 조심스럽게 계획을 세웠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전쟁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불투명했고, 둘 중 어느 쪽도 지원하지 않거나 한쪽만 지원하면 위험이 닥칠 것 같아 메테르니히는 무장 중립을 선택했다. 즉, 러시아에 맞서는 나폴레옹을 지원하되 주공격에는 가담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1812년 나폴레옹은 그때까지 전쟁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모스크바에 당도했으나, 혹독한 추위와 허기로 인해 나폴레옹 군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러시아, 스웨덴, 프러시아와 합스부르크 제국은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승리했고, 나폴레옹은 폐위됐다. 그 후 나폴레옹은 유배지 엘바섬을 탈출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워털루전투에서 다시 패배하여 센트 헬레나 섬에서 쓸쓸히 최후를 맞았다. 1814년의 빈 국제회의에서 유럽의 지도가 수정됐다. 메테르니히는 원하는 바를 이루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대부분 되찾았다. 신성로마제국은 복원되지 못했지만, 오스트리아 영지를 포함한 독일연방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주도 아래 신성로마제국의 자리를 대신했다. 오스트리아는 중앙 유럽에서 북쪽으로는 독일연방, 남쪽은 이탈리아에까지 폭넓은 영향력을 미쳤고, 러시아와 프랑스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듯 메테르니히에 의해 유럽의 지도가 절묘하게 다시 그려졌다. 빈회의는 국제 위기를 전쟁보다 회의를 통해 해결하는 편이 더 나을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메테르니히가 길잡이 역할을 맡은 덕분에 오스트리아 제국은 나폴레옹에게 빼앗겼던 지위를 되찾았고, 유럽의 주요 중재자로 떠올랐으며, 거의 40년 동안 혁명의 무질서에 맞서는 보루가 되었다.

 

베를린회의와 사라예보의 총성
1878년에 열린 베를린회의에서 독일 대표 비스마르크와 영국 대표 디즈레일리 그리고 합스부르크 제국 대표 언드라시는 불가리아를 발칸반도의 위성국으로 삼으려는 러시아 황제를 압박하여 대불가리아 개념을 포기하도록 했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는 베를린회의를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가 되었지만, 일시적인 군사보호령일 뿐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이들 지역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기 바랐으나 언드라시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 지역을 합스부르크 제국에 편입하면 슬라브인과 독일과 헝가리인 간의 미묘한 균형이 깨질 것으로 언드라시는 예상했다. 하지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편입하지 않으면 이곳을 세르비아에 빼앗길 우려가 있어, 이들 지역을 모호한 지위로 유지하기 위해 놔두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연유로 프란츠 요제프는 새로 획득한 그 영토를 합스부르크 제국의 반쪽인 시스라이타니아와 헝가리에 할당하지 않고 공동 재무부의 관할권 아래에 두었다. 한편, 베를린회의에서는 세르비아가 술탄의 속국이 아니라 완전한 독립국이라고 인정하였다. 이렇게 합스부르크 제국이 보스니아를 차지하여 세르비아 땅에서 오스만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변경의 무장지대는 용도 폐기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것을 일시적인 해법이라 생각하고, 1908년에 이들 지역을 제국에 합병해버렸다. 그런데 합스부르크 제국의 외무장관은 러시아가 합병에 동의한다고 생각했으나 이는 오해였다. 러시아는 이를 계기로 세르비아와 가까워졌고, 빈의 정치인들은 세르비아가 러시아의 지원에 힘입어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 안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인들을 선동해 해방할 것으로 의심했다. 세르비아의 정세는 불안하고 민주적이지 않았다. 군대와 안보기관 내부에서 활동하는 비밀결사와 테러집단 때문에 국가의 여러 기관은 껍데기뿐이었다. 특히 세르비아의 군사정보부 책임자 디미트리예비치가 이끄는 흑수단(黑手團)은 자국의 왕과 왕비를 암살할 정도로 호전적인 조직이었다. 이 흑수단에 욕구불만인 청년들을 규합하여 테러 등을 통해 합스부르크 제국 치하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해방하여 세르비아에 편입시키려 했다. 1914년 6월 28일 합스부르크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기회를 노리던 세르비아의 흑수단이 총과 폭탄을 들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디미트리예비치가 베오그라드에서 무장시킨 6명의 청년이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무개차를 타고 사라예보 시내를 지나가고 있을 때, 청년들이 폭탄을 투척했으나 폭탄이 늦게 터져 대공 부부는 무사했다. 30분 뒤 대공 부부는 폭탄테러로 부상한 사람들을 문병하기 위해 차를 돌이켜 병원으로 향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 근처를 서성이던 공모자 중 한 명이 서 있는 곳 가까이에 차를 세우는 순간에 치명적인 두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세계대전과 합스부르크의 해체
유럽 전역에 퍼진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의 서거 소식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계속되는 비극이었다. 유럽의 신문들은 “늙은 황제의 비극-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라고 대서특필했고, 영국의 더 타임스는 “황제는 평범한 사람이 느낄 수 없는 끔찍한 슬픔을 견뎌야 하는 숙명을 안았다”고 썼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페르디난트의 암살사건 직후 바로 복수전을 펼쳤더라면 전폭적인 지지는 아니더라도 유럽 열강의 이해를 얻어낼 수는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러시아도 세르비아의 부당한 행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루마니아도 합스부르크 편에 공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전쟁을 미루었다. 이렇듯 결단을 미루는 바람에 프란츠 요제프는 주도권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의 전쟁 목표가 점차 세르비아를 완전히 지도상에서 지워버리자는 식으로 확대되자, 오히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침략자처럼 보이게 되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1914년 7월 내내 알프스산맥의 도시 바트이슐에 머물렀다.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외무장관 베르흐톨트가 최후통첩을 세르비아 정부에 보내자고 거듭 제안했고, 황제는 마침내 수락했다. 7월 23일 베오그라드 주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사는 세르비아 정부에 최후통첩을 전달했고, 5일 뒤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러시아는 세르비아 편에 섰고, 독일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두둔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 편을 들었다. 이로써 1주일 만에 유럽이 온통 전쟁에 휘말렸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전투 의욕이 떨어지는 병사들을 다그치기 위해 민족 감정에 호소했다. 즉, 병사들이 자기 민족의 숙적과 싸울 기회에 이끌리도록 했다. 폴란드인은 러시아인을, 크로아티아인은 세르비아인을, 헝가리인은 모든 슬라브인을 상대로 전쟁을 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처음엔 민족주의에 대한 호소가 효과를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진지한 애국심보다 민족적 증오심에 휩싸인 나머지 미친 듯이 민간인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제국군은 장비와 훈련이 부족했고, 동부와 서부전선이 천 킬로미터에 걸쳐 배치되어 있어 기동력이 떨어지는 점도 불리하여 이내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자 프랑스의 베르동을 포위하고 있던 독일군이 공세를 취하는 러시아군을 저지하는 동맹군을 지원하기 위해 서둘러 이동했다. 이로써 독일군이 전쟁을 주도하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전략 지휘권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넘어갔다. 전쟁이 한창이던 1916년 11월 프란츠 요제프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내일 아침 3시 30분에 깨워주게”였다. 86세의 늙은 황제였지만 평소처럼 일찍 일어날 생각이었다. 그에게 아들이 없어 후계자는 조카의 아들 카를이었다. 황제가 된 카를은 지루한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그는 “전쟁은 이길 수 없고 무의미한데, 우리가 이토록 죽을힘을 다하는 이유를 모르겠소”라고 참모에게 말했다. 1917년 미국이 참전했다. 애초에 윌슨 미국 대통령은 합스부르크 제국을 무너뜨릴 의도가 없었다. 1918년 1월에 발표된 윌슨의 ‘14개 평화원칙’ 개요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러 민족에게 “자주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기회를 부여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후 1918년 6월 윌슨은 “슬라브 인종의 모든 분파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연합국이 합스부르크 제국을 해체하고 독립적인 민족국가들로 대체하는 방안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해 10월 초순 독일 정부는 서유럽 연합국과 정전협상을 시작했다. 카를 황제도 점증하는 자치요구를 수용하여 민족별로 국가를 재편성하자는 성명을 냈으나 헛수고였다. 새로 발족한 민족위원회의 대표자들이 프라하와 자그레브, 트란실바니아에서 정권을 이미 잡았고, 자신들이 구성한 정부만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제 합스부르크 제국은 유명무실해졌다. 오스트리아 영지에서조차 독자적인 독일계 오스트리아 국가가 선포되었다. 그해 11월 카를 황제는 공무를 포기했다.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 카를 레너가 쇤브룬 궁전에서 카를 황제에게 망명을 재촉하자, 제국 의회에 남아있던 의원들이 공화국을 선포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그 운명이 독일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에 몰락했다. 전쟁에서 발을 뺄 수 없어 독일의 군사적 패배가 합스부르크의 패배가 되었다. 반면에 독일과 동맹국 불가리아, 오스만제국의 지역을 빼앗겨 영토가 크게 줄어든 튀르크는 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천년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은 완전히 붕괴했고, 영토는 6개의 국가로 나뉘었다. 그 폐허는 거대하고 황량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접착력은 이미 약한 것으로 밝혀졌고, 정체성과 충성심은 민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왕가의 명성이 흔들리자 정치적 통합이나 집단적 과업을 통해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러 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공동의 유대감은 사라졌다. 한때 합스부르크 가문의 장점이 건강과 장수였으나 지나친 혈통 중시의 근친결혼과 그로 인한 유전병은 몰락의 한 원인이 됐다. 이렇게 합스부르크의 천년 지배가 끝이 나고, 미술품과 건축물들만 찬란했던 세월을 증언하고 있다.

(한국해사문제연구소 강영민 전무, timkang@hanmail.net)

한국해사문제연구소 강영민 전무 komares@chol.com

<저작권자 © 해양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