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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사문제연구소 50년(下)- ‘묵암 제해록’

기사승인 [571호] 2021.04.01  14: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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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대 이사장 시대-출판, 교육, 연구사업...사옥 매입(1985.8-현재)

   
 

한국해사문제연구소 50주년을 기념해 2017년 발간된 박현규 이사장의 회고록 ‘묵암 제해록’의 내용중 10장 한국해사문제연구소 부분을 실었다.(자료부분 보완).   -편집자 주-


 
윤상송과 한국해사문제연구소
나는 내가 한국해사문제연구소의 이사장이라는 자리를 맡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다. 무언가 궁리하고 연구하기를 좋아하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연구기관의 책임자가 되어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내 성격에 맞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1985년 8월에 재단법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의 이사장이 되었다. 해운산업 산업합리화 과정에서 봉착했던 고려해운의 와해 위기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대표이사로서의 책임을 면할 수 없어 고려해운의 대표이사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뒤였다. 내가 고려해운의 대표이사가 된 것은 상술하였듯이 해운산업 산업합리화 작업이 막 시작된 1980년 10월이었으므로 경영상 부실책임이 나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표이사라는 자리는 언제나 무한책임을 져야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사표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윤상송

그래서 막상 사표를 제출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으로 책임이 해소된 것도 아니려니와 앞으로의 삶이 참으로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집구석에 가만히 앉아 무엇인가에 매달려 골몰하는 성격도 아니어서 밖으로 쏘다녔다. 대표이사라는 자리를 떠난 사람으로서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눈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던 1985년 8월 어느 날 윤상송(尹常松)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윤상송은 평소에 존경하는 해운계의 대 원로였는데, 병환으로 출근을 하지 않은 날이 꽤 오래되었다는 얘기를 듣고도 한번쯤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조차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던 때였다.
윤상송은 1916년 8월 15일에 우리나라 최북단인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읍에서 태어나, 1994년 11월 18일 서울에서 이 세상을 하직한 해기사 출신의 1세대 해운인이다. 윤상송은 광복 5년 전인 1940년 12월에 도쿄고등상선학교(東京商船大學의 전신) 기관과를 졸업하고, 조선우선의 2,700총톤급의 안주환(安柱丸)에 3등 기관사로 승선하였다. 안주환에서 하선한 후에는 주로 육상에서 신조선의 인수 감독 등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광복 직전에는 일본이 전시통제의 목적으로, 한반도 안의 모든 기범선(機帆船)을 통합하여 운항하기 위하여 만든 조선선박통제회사 원산지점으로 전출되어 제3석으로 근무하였다.


그 뒤 1954년 1월부터 1959년 5월까지 약 5년 5개월 동안은 동남해운(東南海運)1)의 부사장으로 근무하였다. 그리고 1960년 8월부터 1962년 6월까지 약 1년 10개월 간 한국해양대학의 학장으로 봉직하였으며, 1964년 4월부터 1966년 4월까지 만 2년간은 한국수산개발공사의 상임고문으로 근무하였다. 그 뒤 1968년 3월부터 1971년 2월까지 약 3년간 한국선주협회 이사장으로 봉직하였다. 한국선주협회 이사장직을 물러난 뒤 윤상송은 곧바로 재단법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를 창설하여 1971년 4월부터 1985년 8월까지 13년 4개월간 봉직하다가, 병환으로 쓰러진 뒤 이사장의 직함을 사임하였다. 어쨌든 윤상송은 1971년 3월 31일 교통부의 설립허가(해항 1521-847호)에 의해 한국해사문제연구소를 창설함으로써 해운인으로서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윤상송은 내가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할 때 해운공사에서 이사를 겸하여 선박부장을 맡은 상사였고, 해사문제연구소나 한국해운학회 등 자신이 주도하여 설립하는 단체에는 반드시 나를 불러 발기인으로 참여시키고는 감사나 이사라는 직함을 주었다. 그만큼 나를 아낀 분이었다. 그런 분이 와병으로 출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찾아보지 않은 것은 너무도 큰 선배여서 어려움을 느낀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성품이 나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전화까지 받은 마당에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찾아뵈었더니 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이 되어 달라는 말씀이었다. 처음에 나는 아직 연구소를 이끌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그러나 윤상송은 자신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았지만, 자격을 갖춘 사람을 찾지 못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모처럼 만든 연구소의 문을 닫아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말하고, 우선 누군가가 명맥이나마 유지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몇 번이나 당부하는 말에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이사장을 맡기로 하였다.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운영
이러한 경위로 나는 해사문제연구소의 이사회의 승인으로 1985년 8월에 재단법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때의 내 심정은 이사장 자격을 지닌 마땅한 사람을 찾을 때까지만 이사장으로서 중간 다리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2017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30년이나 이사장이라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신에 나는 연구소 본연의 업무인 연구에 직접 간여하기 보다는 연구소가 연구소답게 발전할 수 있는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 힘을 쓰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연구소다운 연구소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늘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다만, 전임자의 당부대로 연구소의 문을 닫게 하지는 않고 민간연구소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하자는 마음 하나로 지금까지 일해 왔다. 연구소에 몸담고 있는 직원들이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거의 의무감에 가까운 마음가짐으로 매일 출근하였다. 넉넉하지 않은 연구소의 살림살이를 감안하여 내가 받을 몫으로 직원들의 월급에 채워주겠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무보수로 일하고 있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직원들에게 연구소는 여러분의 직장이고 누가 가져가는 사람도 없으니 여러분이 번만큼 가져가도 좋다고 말하곤 하였다. 주변사람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민간연구소가 46년이나 되었다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물론 지난 30년 동안 어려운 고비도 없지 않았으나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연구소 설립자의 뜻을 받들고 나와 고락을 같이한 직원들의 일터를 지키기 위하여 성심을 다했더니 하늘이 도운 것 같다. 특히 전임자로부터 연구소를 물려받았을 때는 재정상태가 거의 바닥에 달했으나 지금은 어느 정도 나아져 넉넉하지는 않지만, 직원들에게 월급을 줄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한데 대해 감사할 뿐이다. 이젠 하루빨리 연구소를 사심 없이 이끌 인재가 나와 해사문제연구소의 이사장이 되어 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연구소를 위한 나의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한다.


나는 1985년 8월에 재단법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피임되고 나서 두 달 뒤인 10월에 월간 해양한국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문화공보부(文化公報部)에 대한 등록도 마치었다.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서의 문화공보부에 대한 등록이 이처럼 2개월이나 뒤늦은 것은 원래 등록할 때 한국해사문제연구소의 이사장 자격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구소 이사장으로서의 등록이 선행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의 취임과 함께 나는 한국해외취업선원납세조합의 조합장에도 취임하였다. 한국해외취업선원납세조합의 조합장이라는 것 역시 관할 세무서에 신고해야 하는 절차가 필요하였다. 하지만 한국해사문제연구소의 이사장이나 월간 해양한국의 발행인 겸 편집인이라는 직위에 대한 허가나 등록의 경우처럼 의무 사항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신고만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별도의 절차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해외취업선원납세조합은 해사문제연구소의 운영과 관련하여 아주 귀중한 존재였다.


해사문제연구소가 산하에 한국해외취업선원납세조합
을 설치한 것은 1975년이었는데, 이 문제는 연구소의 설립 당초부터 내부적으로 논의된 사항이었다. 우리나라의 첫 번째 선원 관계 납세조합은 한국해기사협회의 간부로 취업한 이헌탁(李憲琸)을 중심으로 한 몇몇 사람이 해외에 취업한 우리 선원들에게 납세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한국선원납세조합이다. 1934년 경상남도 창령에서 태어난 이헌탁은 한국해양대학 항해과 12기 출신으로 한국해기사협회 상무이사로 있을 때, 우리나라 최초로 선원납세조합을 결성했다. 두 번째 납세조합인 한국해외취업선원납세조합은 서울에 본사를 둔 천경해운, 코리아라인, 영신상운, 미륭항해 같은 해외취업선사들이 선원들의 납세편의와 함께 해사문제연구소를 돕기 위해 만들었다. 한국해외취업선원납세조합은 1975년 1월 서울지방국세청의 설립승인(개인 1234-1188호)을 받고 업무를 개시하였다. 당시에는 을종근로소득의 원천징수와 연말정산에 관한 세무가 정립되어 있지 않아 혼선을 많이 빚었는데, 필요할 때마다 납세조합을 중심으로 세제당국인 재무부와 국세청에 질의하여 유권해석을 받아내어 세무행정 정착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당시의 국세청은 외국의 선주에게 고용되어 취업하고 있는 선원들의 을종근로소득세를 효과적으로 징수하기 위해 납세조합 설립을 인가하였고, 납세조합을 통해 세금을 납부하면 조합공제와 함께 납부세액의 일정액의 교부금을 지급하였다. 선원들에게는 납세조합공제 혜택을 주고 납세조합에게는 교부금을 지급하여 일거양득이었다. 이러한 교부금 수입으로 조합을 운영하고, 여유자금으로 연구소가 발행하는 해양한국을 구입하여 조합원 가정에 우송하여 해운계 소식을 전하는 한편, 해사문제연구소의 수지개선에도 도움을 주었다.   

 

출판과 교육과 연구사업
1985년부터 2017년 현재까지 32년간 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있는 동안 했던 일은 고려해운이나 KCT
C를 경영할 때와 비교하면 단순한 일이었다. 월간 ‘해양한국’ 발간, 연구소의 주 업무인 해운전문서적의 출판, 연구용역의 수행과 사사 편찬, 교육사업, 기타 해사문화 고취 사업 등이 전부였다. 크게 분류하면 연구사업, 출판사업, 교육사업인데, 이를 일일이 설명하기보다는 나름 의미가 있었고 보람도 느꼈던 몇 가지 사항들을 소개한다.


해사문제연구소의 이사장에 부임하고 나서 제일 신경이 써지는 것은 해양한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해양한국은 우리 연구소의 얼굴이니 잘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보기 좋고 읽을거리가 많은 책, 무엇보다 독자들이 기다리는 잡지를 만들도록 지시하였다. 그 후 해양한국의 판형을 키우고 4도 컬러인쇄를 하여 모양을 바꾸는 한편, 내용면에서도 그동안 논단 위주의 기사에서 탈피하여 기자들이 현장에서 취재한 기사들을 게재하여 현장감 있는 소식을 독자들에게 전하였다. 월간지의 특성을 살려 기획과 분석 기사들을 게재하여 독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국ABC협회의 정기공사에서 유료부수 2,000부로 인증받아 우리나라 해운매체 가운데 발행부수 1위에 올랐다. 해양한국이 1973년 10월 창간 이후 2017년 3월 현재까지 44년간 한 번의 결간 없이 통권 521호를 기록한 것은 해운업계의 후원과 독자들의 성원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해운물류업계에 제대로 된 용어사전이 없어 혼선을 빚는 등 불편을 초래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오랜 기간 작업하여 2002년 4월 ‘해운물류큰사전’을 편찬하였다. 또한 그동안 한국선주협회가 발간하던 ‘외항선명록’을 인수하여 확대 개편한 ‘한국해운편람’을 1979년 8월 이후 매년 발간하고 있으며, 한국국제해운대리점협회에서 발간하던 ‘포트태리프 코리아’도 2000년 6월 우리 연구소가 인수하여 지금까지 매년 발간하고 있다. 협조해준 국제해운대리점협회 임직원들, 특히 당시 회장이던 이윤수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둘째는 연구소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연구사업의 활성화였다. 해사문제연구소의 초창기에는 ‘연안해운실태조사’ ‘한일간콘테이너선 운항의 풀링 시스템 연구’ ‘콘테이너화물의 원활한 유통에 관한 연구’ 등 연구활동이 간간히 이루어졌으나 해운관련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이 발족한 이후 ‘율촌제1산업단지항만시설 이용을 위한 해상교통평가 연구’ ‘선원인력 양성과 매력화방안 연구’ 등에 그쳐 연구용역 수주가 용이하지 않았다. 따라서 연구사업 방향을 사사와 평전을 발간하는 쪽으로 전환하였다. 그에 따라 ‘한국해운항만사’ ‘현대한국해운발전40년사’ ‘해운항만청사’ ‘한국해운60년사 및 선원열전’ ‘잃어버린 항적’ ‘한국컨테이너부두공단사’ ‘한국해운조합50년사’ ‘국제해운대리점발전사’ ‘천경해운50년사’의 발간 등으로 연구 활동을 대체하였다.


차제에 첨가하고 싶은 것은, 내가 평생 해야 할 일 중에 한 가지는 평소에 존경하던 해운계의 인물들의 평전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분들 중에는 나의 스승도 있고, 선배도 있고, 동료도 있는데, 해양대학 창립자 이시형 학장과 해사문제연구소 창립자 윤상송 박사와 나의 절친한 친구 이준수 해양대학장이다. 내가 눈을 감기 전에 이 일을 꼭 하고 싶었는데, 2011년 4월 삼주 윤상송 자서전 ‘바다에 미래를 걸다’, 2012년 12월 ‘해당 이시형과 한국해양대학’, 2013년 11월 ‘상보도해록’을 차례로 발간하여 마음의 큰 짐을 덜었다.
셋째는 교육관련 사업이다. 백년지대계인 교육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도 없으나 특히 내가 해운실무교육의 필요성을 더욱 느낀 것은 일본선주협회 회장 네모토(根本)가 내게 말한 사실 때문이다. 그의 말인즉, 자사 직원들을 외국에 보내 어느 나라가 해운업에 강점이 있는지를 조사하도록 지시하였더니, 북구의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와 그리스라는 보고서가 올라왔다고 한다. 인구도 적고 해상물동량도 부족하며, 이렇다 할 해양대학도 없는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세계해운을 지배하는 이유는 기업들이 재직자를 대상으로 하는 해운실무교육을 철저히 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도 어렸을 때부터 가정에서 가족에게 해운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자라 해운에 대한 꿈을 갖게 되고 직장에 들어가서도 실무재교육을 통해 해운을 배우고 익히기에 그리스가 세계 1위의 선복량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사문제연구소 정관의 제4조 사업에 ‘평생교육시설 해운물류교육원을 설립·운영하여 인력양성’이라는 조항을 추가 삽입하고 해운실무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 결과 2005년 8월에 해사문제연구소 부설 해운물류교육원을 설립하였고, 이어 노동부에 신청하여 평생교육훈련기관으로 지정되었으며, 해양수산부로부터 해운물류전문인력양성교육기관으로 선정되어 해운물류교육을 시작하였다. 물론 2001년부터 해운실무교육을 실시해왔으나 이때부터 해운물류교육을 본격적으로 시행하였다. 또한 2010년 8월 국토해양부로부터 글로벌선박금융전문인력양성교육기관으로 선정되어 해운회사와 금융기관의 재직자 대상으로 선박금융교육을 지금까지 시행하고 있다. 선박금융교육은 해사문제연구소가 금융연수원과 한국해양대학교와 함께 컨소시엄 형태로 운영하고 있는데, 이 교육과정은 국내교육과 장기 해외연구교육을 함께 시행하며, 해외교육은 영국 카스 비즈니스스쿨 선박금융석사과정에 유학을 보내고 있다. 2016년까지 해운실무교육을 총 52회 실시하여 1,204명 교육시켰고, 해운물류전문인력양성교육은 46회로 1,036명을 교육시켰으며, 글로벌선박금융전문인력양성교육은 17회로 국내집체교육 251명, 해외유학으로 석사학위 취득자 9명을 배출하였다. 그 밖에도 용선업무 및 선하증권 심화과정과 대학생 위주의 주말반과정을 실시하여 많은 수료자들을 배출하고 있다. 이렇듯 해사문제연구소의 교육을 통해 해운전문인력을 양성하고 있다는 데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선상세미나 및 항만견학 행사를 시행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해운회사에 다니면서도 배를 타보거나 항만을 돌아볼 기회가 없던 직원들과 그 가족들에게 배도 타보고 배가 드나드는 항만도 살펴볼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1996년 5월 제1회 바다의 날 기념으로 선상세미나 및 중국 항만 탐방행사를 시행하였다. 그 이전인 1994년 4월부터 선상세미나 및 항만견학 행사를 시행해 왔으나 새로 제정된 5월 31일 바다의 날에 맞추어 새롭게 시행하였다. 제1회 바다의 날에는 위동항운 골든브리지호를 타고 선상에서 세미나를 갖고 중국 항만을 견학하고 산둥반도의 장보고 사적지 탐방과 백두산 등정, 연길과 용정의 독립운동지를 살펴보고 귀국하였다. 선상세미나 강사였던 서울공대 김재근 명예교수와 한국해양대 민성규 교수 및 이준수 명예교수를 비롯한 백여명의 참가자들과 함께 민족의 영산 백두산 정상에 올라 천지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던 때가 엊그제 같다. 그 당시 KBS 방송기자가 동행하여 우리 일행의 일정을 취재하여 보도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21년 동안 매년 바다의 날이 되면 해운가족들이 배를 타고 중국과 일본의 항만과 사적지를 탐방하는 행사를 계속하고 있다.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창립 40주년 기념식(2011.4.1.)

 

또한 조찬회 콤파스와 한일공동해사포럼도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해운계 원로와 CEO를 비롯한 오피니언 리더들이 매월 첫째 금요일 아침에 모여 해운현안과 이슈에 관한 주제발표와 활발한 토론을 통해 건실한 여론을 조성하고 정책대안을 도출하는 의미있는 모임인데, 1992년 이후 지금까지 25년째 갖고 있다. 한일공동해사포럼은 해사문제연구소와 일본의 해사신문이 공동으로 해사문제 전반에 관한 주제로 한국과 일본 양국을 교대로 돌아가며 개최하는 포럼이다. 특히 2011년 4월 해사문제연구소 창립 40주년 기념 해사포럼에서 ‘동아시아 해운물류의 현상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일본해운경제학회 명예회장 미야시타(宮下) 교수와 2012년 11월 ‘마리타임 저팬의 현상과 전망’으로 주제발표한 일본앵카쉽매니지먼트 쯔지() 사장과 함께 그때마다 방문하여 개회사를 한 일본해사신문 오야마(大山) 사장이 인상 깊었으며, 기억에 오래 남는다.  

    

사내근로복지기금 설립과 사무실 매입 이전
마지막으로 추가하고 싶은 것은 해사문제연구소의 사내근로복지기금 설립과 사무실 이전이다. 평소 박봉에 고생하는 직원의 처우를 개선하고 싶었으나 연구소의 재정이라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기금이랄 게 별로 없고 수입원도 뻔해 그달 벌어 그달 쓰기에 빠득하여 직원들에게 늘 미안하게 생각해왔다. 그러던 차에 2004년 6월 어느 날 일본선사 NYK가 자사의 한국 대리점인 소양해운을 현지법인화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의 소양해운 임직원들은 사내근로복지기금의 처리를 두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내근로복지기금법 제23조의 2에 의하면, 해산한 기금의 재산은 당해 근로자에게 지급할 의무가 있는 금품지급에 우선 사용하고, 그 잔여재산이 있을 경우에는 50%를 초과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정관이 정한 바에 따라 소속 근로자의 생활안정자금으로 지원하고, 그래도 잔여재산이 있을 경우에는 정관이 지정한 자에게 지급하고 지정된 자가 없을 경우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중소기업근로자복지진흥법에 의한 근로복지진흥기금에 귀속하거나 다른 사내근로복지기금에 귀속할 수 사용할 수 있는데, 비영리 중소기관의 사내근로복지기금에 우선적으로 지급할 수 있다고 당시의 노동청 담당자가 유권해석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해사문제연구소는 사내근로복지기금설립준비위원회를 급히 구성하고 1,000만원 기금을 출연하여 재단법인 설립총회를 열어 정관제정, 임원 및 운영위원 선임, 사업계획 등 소정의 절차를 마친 후 관할관청인 노동청에 기금설립신청을 하여 2004년 8월 5일 서울지방노동청으로부터 기금설립인가(인가번호 101-2004-3호)를 받고 이어 등기를 마쳤다.


그 후 연구소 출연금 1,000만원에다가 소양해운 사내근로복지기금으로부터 받은 5억 100만 203원을 합쳐 연구소로서는 거액인 5억 1,100만 203원을 기금으로 하는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사내근로복지기금이 탄생하게 되었다. 짧은 기간에 이 일이 성사될 수 있도록 힘써준 당시 소양해운의 이윤수 사장을 비롯한 임직원들에게 고마움을 금치 못하겠다. 여기엔 내가 소양해운의 4대 주주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2006년부터는 노동청의 권장사항인 선택적 복리후생제도를 도입하여 필수와 자율로 나누어 직급별로 사내행사와 의료서비스, 교육지원, 생활주거안정, 여가서비스 항목에 사용할 수 있게 하여 직원들의 복지향상에 도움을 주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내가 보람으로 생각하는 것 중의 또 하나는 2014년 9월 해사문제연구소의 사무실을 매입하여 이전한 일이다. 해사문제연구소 설립자 초대 이사장 윤상송은 설립기금 500만원을 마련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재정상황이 넉넉하지 못해, 제대로 된 사무실을 구하지 못하고 자택인 마포구 공덕동 자택을 사무실로 하여 1971년 4월 1일 연구소를 개소하였다. 이런 사정을 전해들은 천경해운의 김윤석 사장이 연구소를 찾아와 자신이 쓰는 북창동 93-36 사무실의 사장실 절반을 할애하여 연구소 사무실로 쓸 수 있게 배려하며, 집기와 물품까지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천경해운이 을지로 1가 백남빌딩으로 사무실을 옮기거나, 1975년 2월 을지로 2가 보승빌딩으로 이전할 때마다 해사문제연구소도 함께 사무실을 이전하게 되었다. 특히 보승빌딩은 천경해운이 매입한 건물이므로 이 빌딩 902호를 연구소에 할당하여 연구소가 독자적으로 간판도 달고 집기와 사무용품도 구입하고 직원도 확충하는 등 연구소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연구소의 재정이 사무실 임차료를 제대로 지급할 형편이 못되는 것을 잘 아는 김윤석 회장은 오랜 기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보승빌딩 입주자들이 바뀔 때마다 가능한 한 사용평수를 늘려주어 32평의 902호에서 1002호로 옮겼을 때는 69평으로 크게 늘어났고, 나중에 교육을 위한 강의실 25평을 합치면 총 94평을 사용하게 되었다. 김윤석 회장은 연구소에 들를 때마다 사무실을 둘러보고 평수를 늘려주었는데, 특히 나의 이사장실이 비좁다며 빨리 늘리라고 자기 직원을 불러 즉석에서 지시하였다. 고인이 되었지만, 남을 배려하고 도와주는 김윤석 회장의 성품을 잊을 수가 없다. 이렇듯 처음에는 무상으로 사무실을 사용했으나 세무서가 무상에 대한 인정과세를 부과한다는 말에 관리비만을 지급하다가 연구소의 재정상황이 이전보다는 좋아져 시세의 70% 정도의 임차료도 지급하게 되었다.


해사문제연구소는 42년간 을지로 2가의 보승빌딩 사무실을 이용해왔는데, 사무실을 이전해야 하는 특별한 사유가 생겼다. 첫째는 보승빌딩 주변지역이 재개발되어 조만간 신축을 해야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둘째는 한국선주협회가 여의도에 있는 빌딩을 매입하여 이전하였으나 그동안 사용하던 당주동 사무실이 매각이 안되어 1년 이상 비어있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해사문제연구소는 비영리재단법인이므로 고유목적사업준비금을 매년 적립해 왔는데, 그 기금이 8억 7,320만원에 달했으며, 1년 이내에 사용하지 않으면 과세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 배경에서 2014년 해사문제연구소 이사회는 선주협회가 사용하던 당주동 100번지 세종빌딩 10층의 140평을 연구소의 고유목적사업준비금과 일반재정을 합해 매입하는 사무실 이전 안을 가결하였다. 그리고 선주협회와 상담하여 선주협회 소유 350평 가운데 140평을 잘라 평당 1,000만원으로 계산하여 총 14억원에 매입하는 매매계약을 체결하였다. 7월 11일 부동산매매에 따른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치고 등기권리증(서울지방법원 중부등기소 부동산고유번호 1103-1996-043218)을 받으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였다. 그해 8월 한 달 동안의 인테리어 공사를 마치고 9월 1일 입주하였고, 모든 정리를 마친 10월 7일 입주식을 거행하였다. 비용은 매입비 14억원, 인테리어비용 1억 1,200만원, 취득세 및 공과금 6,800만원 등 약 16억원이며, 소요자금은 고유목적사업적립금과 일반재정 12억원에다가 해사재단의 지원금 4억원으로 충당하였다. 해사문제연구소가 창립된 이래 처음으로 자기 사무실을 갖는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협조해준 선주협회와 해사재단에 깊이 감사하고 있으며, 사무실 이전에 즈음하여 고려해운과 KCTC도 각각 3,000만원을 후원하여 큰 힘이 되었다. 이제 연구소가 을지로시대를 접고 광화문시대를 열게 되었다고 주변 사람들도 축하해주었고, 직원들도 내 집에 살게 되었다며 기뻐하여 보람을 느꼈다.


해사문제연구소가 용역을 받아 편찬한 ‘천경해운50년사’의 발간축사에서 ‘낙과사수(落果思樹) 음수사원(飮水思源)’이란 글을 썼다. 과일 하나 물 한모금도 이를 만든 사람을 생각하며 감사하라는 뜻이다. 생전에 해사문제연구소를 마치 자신의 일처럼 도와준 천경해운 김윤석 회장의 은덕에 감사하는 나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어 해사문제연구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이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그에 보답하는 뜻에서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선용하여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앞으로도 해사문제연구소의 목적사업인 연구사업, 교육사업, 출판사업이 잘 시행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는 데 나의 남은 힘을 후회 없이 다 쏟으려고 한다. 

 

● 주요 행적
△2004. 8 : 사내근로복지기금 설치 △2005. 12 : 월간 『해양한국』 온라인 서비스 개시 △2008년 ‘해양한국’ 판형 변경 및 컬러판 발간 △2011. 8 : 월간 『해양한국』 모바일 및 SNS 서비스 개시 △2013. 10 : 월간 『해양한국』 창간 40주년 기념호 발간 △2014. 9. 1 : 사무실 매입 및 이전(세종대로 23길 세종빌딩1001호) △2015. 5 : 월간 『해양한국』 통권 500호 발간 △2015. 12 :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취업 규정 및 인사관리규정 제정

 

● 용역 수행 및 사사 편찬
△1986. 12 : 해상법 개정에 관한 연구(발주처 : 한국선주협회)  △1995 : 『국제해운대리점업발전사』 △1997. 3 : 『한국항만운송협회20년사』 발간 △1997. 8 : 『해운항만청사』 발간 △1998. 6 : 『부산콘테이너부두운영공사20년사』 △2000. 2 : 『한국컨테이너부두공단10년사』 △2006. 5 : 『KCTC30년사』 △2007. 1 : 『한국해운60년사』 및 『선원열전』 △2008. 3 : 율촌제1산업단지항만시설 이용을 위한 해상교통이용평가 연구(발주처 : 현대스틸산업, 삼우정공, 오리엔트조선) △2009. 2 : 선원 인력 양성과 매력화 방안(발주처: 재단법인 해성장학회)  △2010. 8 : 『한국컨테이너부두공단사』 △2011. 5 : 『한국해운조합50년사』 △2012. 8 : 『천경해운50년사』 △2012. 12 : 『해양안전심판50년사』 △2014. 10 : 『부산항만공사10년사』 △2015. 1 : 『두양상선30년사』


● 해운전문서적 출판
△1994. 6 : 『해운실무입문』 △1999. 12 : 『역사와 바다 : 해양력의 세계여행』(Luc Cuyvers,  Sea Power : A Global Journey, 역자 : 김성준) △2000. 12/ 2005. 3 : 『시파워의 세계사』 1, 2(靑木榮一 저, 최재수 역) △2000. 6 : 『포트태리프 코리아』 △2001. 6 : 『잃어버린 항적』 △2002. 6 : 『해운물류큰사전』 △2003. 11 : 『선박행정의 변천사』 △2004. 10 : 『1966년 국제만재흘수선협약』(개정판)(한국선급역) △2004. 10 : 『고속선의 안전에 관한 국제코드 2000』(한국선급역) △2006. 3 : 『신체계 선하증권론』 (엄윤대 저) △2007. 8 : 『MOL JAPAN 물류입문』 △2008. 5 : 『선박안전법해설』(박영선 저) △2011. 4 : 삼주 윤상송박사 자서전 『바다에 미래를 걸다』 △2012. 12 : 해당 이시형학장 전기 『해당 이시형과 한국해양대학』 △2013. 11 : 상보 이준수박사 회고록 『상보도해록』 △2014. 7 : 『포트태리프 2014/2015』 △2015. 1 : 『조상욱 평전』 △2016. 7 : 『포트태리프 2016/2017』 △2017. 5 : 『2017 한국해운편람』 △2017. 7 : 『포트태리프 2017/2018』 △2018. 5 : 『2018 한국해운편람』 △2018. 7 : 『포트태리프 2018/2019』 △2019. 5 : 『2019 한국해운편람』 △2019. 7 : 『포트태리프 2019/2020』 △2020. 5 : 『2020 한국해운편람』

 

● 해운전문 교육
△2001. 10 : 제1회 해운실무교육 실시 △2005. 8 : 해운물류교육원 설립 및 해운물류전문인력양성교육기관 선정(해양수산부), 교육훈련기관 선정(노동부) △2005. 9 : 제1기 해운물류전문인력양성 중견관리자과정 교육 실시 △2006. 4 : 제2기 해운물류전문인력양상교육 실시 △2010. 8 : 선박금융전문인력양성교육기관 선정(국토해양부) △2010. 9 : 제1기 선박금융전문인력양성교육 실시 △2010. 10 : 제16기 해운물류전문인력양성교육 실시 △2011. 8 : 제1기 장기해외연수교육(카스 비즈니스 스쿨 1년 선박금융 석사과정) 실시 △2011. 9 : 제1기 해운물류교육 심화과정(용선론) 실시 △2011. 10 : 제3기 선박금융전문인력양성교육(부산) 실시 △2012. 4 : 제20기 해운물류전문인력양성교육 실시 △2012. 5 : 제4기 선박금융전문인력양성교육 실시 △2012. 6 : 제1기 주말반 해운물류교육 초급과정 실시 △2012. 9 : 제2기 심화교육 용선계약 실무과정 실시 △2014. 3 : 해운물류전문인력양성교육 실시 △2014. 5 : 선박금융전문인력양성교육 실시 △2014. 9 : 장기해외연수교육(KASS Business School 대학원 과정) 실시

 

● 행사 개최
△1994. 4 : 제1차 선상세미나 및 일본 항만 시찰(큐슈 지역) △1995. 4 : 제2차 선상세미나 및 일본 항만 시찰(후쿠오카) △1996. 5 : 제1회 바다의날(이하 회수만) 기념 제3차 선상세미나 및 중국 사적지 방문(웨이하이, 백두산, 룽징, 옌지, 베이징) △1997. 5 : 제2회 제4차 선상세미나 및 일본 항만 시찰(큐슈, 고베, 오사카, 나라, 교토) △2000. 6 : 제5회 제5차 선상세미나 및 일본항만 시찰(일본 큐슈 및 후쿠오카) △2001. 6 : 제6회 제6차 선상세미나 및 중국사적 방문(칭다오, 충칭, 양쯔강, 상하이, 수저우) △2002. 6 : 제7회 제7차 선상세미나 및 일본항만 시찰(큐슈, 하기, 히로시마) △2003. 9 : 제8회 제8차 선상세미나 및 일본항만 시찰(큐슈, 마츠야마, 히로시마) △2004. 6 : 제9회 제9차 선상세미나 및 중국사적 방문(칭다오, 장가계, 시안) △2005. 6 : 제10회 제10차 선상세미나 및 일본항만 시찰(큐슈, 히비키항) △2006. 5 : 제11회 제11차 선상세미나 및 항만시찰(상하이, 지린, 항저우, 칭다오) △2007. 5 : 제12회 제12차 선상세미나 및 항만시찰(오사카, 나라, 아스카, 교토) △2008. 5 : 제13차 제13차 선상세미나 중국 항만 시찰(홍콩, 센젠, 마카오) △2009. 5 : 제14회 제14차 선상세미나 및 항만시찰(후쿠오카, 구마모토) △2010. 5 : 제15회 제15차 선상세미나 및 항만시찰(칭다오, 취푸, 웨이하이) △2010. 10 : 제1회 한일해사물류포럼 개최(일본 오사카, 일본 해사신문 공동 주관) △2011. 5 : 제16회 제16차 선상세미나 및 항만시찰(후쿠오카, 나가사키, 가라츠) △2011. 12 : 베트남 호치민 항만물류산업 견학(의뢰 : 한국해운조합) △2012. 5 : 제17회  제17차 선상세미나 및 중국탐방 △2012. 9 : 한일공동해사포럼 개최(서울) △2013. 5 : 제18회 제18차 선상세미나 및 일본탐방(후쿠오카, 가고시마, 미야자키, 다카치호, 아소산, 키쿠치) △2014. 9 : 제19회 제19차 선상세미나 및 중국항만 문화탐방(다렌, 뤼순, 단둥, 집안, 퉁화, 백두산) △2015. 5 : 제20회 제20차 선상세미나 및 일본항만 및 역사 탐방(후쿠오카, 벳부, 아소산, 야나가와, 가라츠, 나고야, 아리타) △2015. 11 : 제5회 한일 공동 해사포럼 개최(서울) △2016. 5 : 제21회 제21차 선상세미나 및 중국항만 문화 탐방(옌타이, 풍라이, 웨이팡, 칭다오) △2016. 5 : 제21회 제22차 선상세미나 및 일본항만 문화 탐방(오사카, 나라, 교토, 아라시야마)

 

해양한국 komares@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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