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와 30대 초반을 바다에서 보낸 나는 앞을 볼 때에는 시정(視程)이 얼마인지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현재 우리 집은 17층이다. 그래서 복도에 나서면 북한산이 보인다. 서재에서 눈을 들어 오른쪽을 보면 멀리 인천항의 불빛이 보이기도 한다. 이때 시정은 30킬로도 넘는다고 보아야 한다.

시정이 얼마일까 확인하는 버릇은 항해사 선장이라는 직업 때문에 생긴 것이다. 앞에 나타난 선박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는 미리 그 선박의 존재를 확인하여야 한다. 가능한 조기에 이를 발견하여야 충돌을 피할 여유시간이 많기 때문에 넓은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 좋다. 시정이 나쁘면 선박을 발견해서 이를 피할 시간적 여유가 적으므로 더 조심해야 한다. 통상 선박은 12노트로 항해한다. 정면에서 상대 선박이 나타나면 6마일에서 발견하면 충돌까지 15분이 걸린다. 한편 2마일에서 발견한다면 5분만에 충돌하게 된다. 그래서 주어진 현재 시점에서 시정이 얼마인가 주어진 시정에서 상대선박을 빨리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된다.

신성모 캡틴은 영국의 상선학교를 나와 일제 강점기에 외항 상선의 선장을 하신 분으로 국방부장관 및 국무총리 서리를 지내신 분이다. 엑스트라 마스트라고 불렸다. 레이다도 없던 시절에 안개가 자욱한데, 닻을 놓아야했다. 그는 선원들에게 징을 울리라고 했다. 그리고 접근하면서 “닻 투하” 명령을 내렸다. 안개가 걷히고 나서 보니 그렇게 좋은 자리에 정확히 닻이 놓일 수가 없더라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징을 울려서 육지나 물체에 부딪치는 반사음이 돌아오는 시간을 확인하여 물체와의 거리를 읽어낸 것으로 보인다.

레이다가 없던 시절에 어떻게 충돌을 피하여 가면서 항해를 했을지 신기하기만 하다. 많은 충돌사고가 났을 것이다. 안개시 사람들은 기적을 이용했다. 기적이라는 것은 상대선박이 주위에 있다는 것을 가르켜 줄 뿐이지 그 자체로서 충돌을 피하기 위한 정보를 제공해주지는 못하였다. 레이다가 나타나면서 안개가 끼더라도 충돌을 피하기 위한 정보제공이 어느 정도 되게 되었다. 레이다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레이다를 잘 읽어야 상대방의 동작을 알 수 있고 적절한 피항을 한다. 여전히 무중에서 충돌사고가 많이 발생했다. 다시 AIS라는 것이 생겨나서 상대선박의 이름과 이동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정보가 제공되어 상대선박의 움직임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선박의 항해장비의 발달은 결국은 항해사들에게 접근하는 선박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진화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측가능성은 상법에서도 중요한 이념으로서 작동한다.
나는 처음 상법(商法)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첫 시간에 상인들에게 예측가능성을 부여하여 상거래를 촉진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상법의 이념(理念)이라고 설명한다. 상거래를 할 때 적용할 법률의 내용은 무엇이고 자신이 부담하게 되는 손해배상책임은 어떤 것이고 자신의 권리는 무엇인지를 법이 미리 딱 정하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부담하게 되는 손해배상책임을 미리 알게 되면 이를 보험으로 처리되도록 해두면 불측의 손해를 볼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거래를 지속적이고 반복적이면서 다량으로 하게 된다.

상법은 이런 이념을 달성하기 위하여 관련 법제도를 상법전안에 구축해 넣어야한다. 개품운송에 사용되는 선하증권(B/L)제도가 이를 구현하는 대표적인 것이다. 선하증권의 뒷면에는 계약의 내용이 미리 예정되어있다.

수출품이 부정기선에 실릴 경우 언제 도착할지 하자 세월이다. 선박이 풍랑을 만나 항해가 지연되기도 하고, 선박이 부두에 붙을 수가 없어서 선석을 기다리느라고 정박을 오래하게 될 수도 있다. 꽃이나 달걀과 같이 신선한 상품을 제때에 수입자에게 전달할 필요성이 증대하게 되자, 해운의 선각자들은 정기선운항을 개발하였다. 많은 자본을 투자해서 컨테이너 선박을 만들었고, 자신의 독자적인 전용부두도 개발해서 운영한다. 동일 항구로 떠나는 선박의 편수도 1주일에 한번에서 4번으로 늘렸다. 그래서 이제는 수출자와 수입자가 원하는 정확한 시간과 장소에 화물을 가져다 주게 되었다. 컨테이너선 혁명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또한 운송에서 예측가능성을 가져와서 상거래를 원활하게 한 좋은 사례가 된다.

선주책임제한제도도 대표적으로 선주들에게 예측가능성을 부여하는 제도이다. 선주들은 책임제한액수 만큼만 책임을 지므로 이를 보험으로 처리하도록 미리 준비하면 자신은 사업에서 망할 일은 없는 것이다. 사업은 한번 해볼 만한 일이 된다.

한진해운 사태에서 한진해운이 회생절차를 신청하게 되는 근거가 된 채무자회생법도 마찬가지 기능을 한다. 한진해운과 거래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한진해운을 바로 파산시키기 보다는 회생의 기회를 주어 회사를 유지시키겠다는 것이다. 이 제도는 한진해운과 거래하는 당사자들에게 안정감을 주도록 설계된 것이다. 즉, 예측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렇듯 도산법도 예측가능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해상운송에 있어서 많은 국제조약이 존재하는 이유도 관련자들에게 예측가능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국제무역과 이에 수반되는 해상운송은 필연적으로 국제적인 요소를 가지게 된다. 서로 다른 국적의 선박들이 바다에서 만나고 계약의 당사자도 서로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다. 법률관계에 어떤 나라의 법을 적용할지 이에 따라 결과도 달라진다. 자신의 국적의 법률이 가장 익숙하므로 자기 나라의 법률을 적용하자고 고집하게 된다. 계약체결이 늦어지고 분쟁이 생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국제조약을 만들어 하나의 법으로 통일화시키자는 것이 해상법관련 국제조약의 목표이다. 국제조약은 관련 당사자들에게 예측가능성을 부여하여 상거래를 원활하게 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콜럼부스가 미주대륙을 발견한 1492년 이후로 수백년 동안은 목선시대였다. 태풍을 만나면 선박은 여지없이 바다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18세기들어 10척의 선박이 항해를 시작하면 돌아오는 선박은 7척이었다는 기록을 보았다. 19세기 말이 되면서 증기선이 나오고 철선이 나오면서 선박은 안전하게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치는 것이 쉽게 가능해졌다. 그리하여 이제는 항해를 완수하지 못하고 선박이 침몰하게 되면 오히려 비정상인 세상이 되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항해에 나서는 선박은 안전하게 상거래를 마친다는 확신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면서 인류의 무역은 안정화되었다. 예측가능성을 부여한 것이다.

돛을 이용한 원시적인 항해방법은 바람이 있을 때에만 추력을 얻을 수 있었다. 증기선이 나타나면서 일정한 속력을 항상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증기선은 연료로서 석탄이 필요했고 그 부피가 너무 많이 나가서 중간항에서 보급이 필요한 불편함이 있었다. 그 후 디젤기관 등이 나타나면서 연료유로서 더 안정된 추력의 생산이 가능하여 오늘날 정확한 도착시간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 세상은 온통 예측가능성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인간사도 예측가능성이라는 큰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 인간은 한계가 있다. 모든 일이 예측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도 아니고 예측하여 준비를 미리 잘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준비를 하면 예측이 가능하였고 작은 실수나 실패를 하지 않았을 터인데 하고 후회하게 된다. 바다에서 가능하면 멀리까지 조기에 상대선박의 존재를 파악하면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여유시간이 있어서 좋듯이, 직무에서도 미리 준비를 하면 도움을 받고 실패하지 않게 된다. 출발하는 전철시간표를 미리 알아둔다던지, 약속장소에 이르는 길을 미리 검색하게 되면 버리는 시간이 없어진다. 로스쿨에 진학하는 것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선택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들은 희소성도 있고 우선 자격증이 부여되므로 개업을 할 수 있으므로 장래직업에 대한 안정성을 가져다준다. 사람들에게 예측이 가능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 변덕스럽고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이 하면 신용이 떨어진다. 이러한 사람과는 일을 같이 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하여는 예측가능한 여러 행위가 반복되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결국 평판으로 확립되게 된다.

나는 2014년 만 65세까지 정년이 보장된 교수가 되어 학교로부터 큰 예측가능성을 부여받았다. 개인적으로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또한 한 학문분야의 중진인 자에게 이 만큼 큰 혜택은 없을 것이다. 학생들에게는 좋은 강의를, 해상법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를, 업계에게는 산학협동의 성과를 내게 되면 김교수는 실망시키지 않는 예측이 가능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나는 해상법 분야에서 예측가능성을 부여하여 상거래가 원활하게 되어 산업이 발전하도록 노력한 선장출신 교수로서 남고 싶다.

문득 선장시절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넓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한 것이 해상법의 이념인 예측가능성의 부여와 같은 맥락임을 깨닫게 되어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20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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